자고 싶을 때 자는 삶은 가능한가 – 생체리듬의 정치

생체리듬 감시와 처벌 미쉘푸코


삶의 리듬, 생체리듬에 대한 질문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자는 삶은 너무 당연하다. 정해진 출근 시간, 알람 시계, 아침 기상 챌린지 같은 것들이 ‘좋은 삶’의 증표처럼 통용된다. 하지만 가끔은 묻게 된다. 나는 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할까? 자고 싶을 때 자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삶은 왜 허용되지 않을까? 늦게 일어난 날은 왜 자괴감에 시달려야하는가? 그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생체리듬이라는 과학적 언어의 껍질을 벗겨보고, 그 안에 숨은 사회적 질서와 권력, 그리고 인간다운 리듬을 되찾을 가능성을 살펴본다.


생체리듬 신화

생체리듬, 그중에서도 ‘서카디언 리듬(circadian rhythm)’은 낮과 밤의 흐름에 따라 작동하는 인간의 내적 시계라 불린다. 멜라토닌,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은 마치 우리가 기계라도 된 듯, 일정한 시간에 졸리고 일어나게 만든다. 과학은 말한다 — 인간은 본래 낮에 활동하고 밤에 쉬도록 진화했다고.

하지만 생체리듬이라는 말은 비교적 최근, 산업사회 이후에 등장했다. 시계 유전자(clock gene) 같은 개념은 이름부터가 이미 ‘시간’이라는 개념을 내면화한 결과다. 이 리듬이 과연 자연적인가, 아니면 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생명 통제의 또 다른 이름인가?


시간의 역사: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은 언제부터 생겼는가

수렵채집인들은 배고플 때 사냥하고, 피곤하면 쉬었다. 농업 시대에는 계절이 시간표였고, 중세 유럽은 종소리가 하루를 나눴다. 조선시대엔 12시진, 절기, 제례 같은 공동체적 시간이 중심이었다.

우리가 지금 사는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시간 체계는 사실 산업혁명 이후에 만들어졌다. 공장이 돌아가려면 모두가 동시에 일어나고, 동시에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곧 돈이 되었고, 우리는 그 리듬에 맞춰 스스로를 조율하게 되었다.


생체리듬은 누구의 리듬인가

푸코는 근대 권력이 신체와 시간, 공간을 통제한다고 말했다. 생체리듬 역시 이런 규율의 일부일 수 있다. ‘건강한 수면’, ‘정상적인 기상 시간’이라는 말은 단지 의학적 기준이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생산성과 효율의 가면을 쓴 권력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프리먼은 이 흐름을 ‘크로노노멀리티(chrononormativity)’라 부른다. 즉, 특정한 시간 구조가 ‘정상’이 되고, 거기서 벗어나면 게으르거나 문제 있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자고 싶을 때 자는 삶은 가능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인의 삶을 ‘관조’에 두었고, 마르크스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했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했고, 안드레 고르는 기술 발전이 오히려 여가를 줄인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디지털 노마드, 프리워커, 슬로우 리빙 같은 흐름은 이런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 일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잠과 쉼은 생산의 방해물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 리듬이자 권리다.


다르게 살기 위한 다섯 가지 설계

  1. 필요한 만큼만 벌고, 단순하게 소비하기.
  2. 몰입 중심의 짧고 유연한 노동 시간 설계.
  3. 졸리면 자고, 피로를 억제하지 않는 수면 중심 루틴 만들기.
  4. 속도보다 리듬이 중요한 지역으로 거주 이전.
  5. 매일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적기.

말이 쉽지 정말 삶의 방향을 통째로 바꿔야하는 일들이다.


마무리하며 —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정해진 시간표도, 생체리듬도 절대적인 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떤 시대, 어떤 사회가 만든 ‘규범’일 뿐이다. “자고 싶을 때 자는 삶”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몸의 리듬을 존중하며 살겠다는 철학적 선언이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흥미로운 책 보기

생체리듬, 미쉘푸코 감시와 처벌